조자룡의 장판파 싸움은 과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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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229)은 자를 자룡이라 하며 상산군 진정현 사람으로, 원래 공손찬의 부하였지만 나중에 유비에게 귀의했다. 삼국시대의 풍운아였던 조운과 관련된 미덕과 일화는 천 년이 넘게 세상에 널리 알려져 왔다. 유비가 조운을 오호대장의 한 사람으로 봉한 것에서, 조운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것으로 굳어졌다. 「삼국지연의」 제41회에는 조운이 홀로 말을 타고 유선을 구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조조의 대군이 형주로 밀고 들어갔을 때, 유비는 10여 만의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신야에서 강릉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때 장비에게는 후방을 맡기고 조운에게는 가족을 부탁했다. 당양에 이으렀을 때, 조조 군에게 추격을 받아 저항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혼란에 빠졌다. 유비는 처자를 내팽개치고 남쪽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혼란의 와중에서 유비의 가족과 떨어진 조운의 주변에는 기병 30~40명만이 따를 뿐이었다. 그는 어지러운 전쟁터를 이리저리 헤매며 간옹과 감부인을 찾아내고, 조인의 부하 장수인 순우도를 찔러 죽인 후 미축을 구해낸다. 감부인 등을 장판파까지 데려다준 조운은 되돌아가 미부인과 유선을 찾아다니다 도중에 조조의 부하 장수인 하후은을 죽이고, 조조의 자랑거리인 청홍보검을 빼앗는다.
이때 조운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창 한자루와 말 한필뿐이었지만 푸호도 물러시지 않았다. 오로지 유선을 찾아다니다 토담 뒤에 마른 우물 옆에서 미부인과 유선을 발견했다. 더구나 미부인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조운을 몇 번이나 "이 엄중한 포위망에서 구하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짐이 될 뿐이라며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다. 조운은 미부인이 목숨을 끊는 것을 보고, 조조의 군사에게 시체를 욕보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는 토담을 무너뜨려 마른 우물을 덮었다. 그리고 나서 즉시 가슴에 대는 갑옷 끈을 풀어 엄심갑(가슴을 보호하는 쇠판) 아래 유선을 품고, 말에 올라 쏜살같이 포위망 속으로 돌진했다. 도중에 조홍의 부장인 안명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길을 열었다.
그러나 장합의 부대가 습격해 왔다. 조운은 장합을 피해 옆으로 도망치다가 사람과 말 모두 구덩이에 떨어졌다. 장합이 즉시 창을 내찌르려고 했을 때 한 줄기 붉은 광선이 구덩이에서 떠오르며 말을 탄 조운이 하늘을 가르고 뛰어올랐다. 이 광경을 본 장합은 몹시 놀라 도망치고 말았다. 경산 정상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조조는 조운의 기세를 보고 부하에게 말했다.
"활을 쏘아서는 안 된다. 생포하라."
엄중한 포위를 뚫고 탈출했을 때, 조운의 옷은피로 물들여 있었다. 유비를 만나자마자 그는 말에서 내려 엎드려 울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빌고는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유선을 유비에게 바쳤다.
이처럼 조운이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한 이야기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사의 기술이 아주 간력한 것으로 보아 모두가 사실 그대로 단정할 수는 없다.
<조운전>에는 유비가 당양의 장판에서 추격을 받는 장면의 기록이 있다.
"유비가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을 때, 조운은 갓난아기를 가슴에 안고 그 생모인 감부인을 보호하며 같이 난을 피했다."
조운이 직접 주인을 구한 것과 관련된 기사는 원문에 불과 한 문장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행위와 동작, 결과를 나타내는 말은 `안고`, `보호하고`, 모두 피할 수 있었다.` 정도일 뿌능로 아주 간략하다.
이것에 대해서는 원대 「삼국지평화」의 묘사도 아주 간단해 원문에 2백 자 내외의 서술이 있을 뿐이다. 이야기 자체도 조운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관중은 이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실을 기초로 허구화하고 과장하여 긴장감있게 일련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조운의 문무를 겸비한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다. 나관중이 과장한 조운의 지혜는 미부인이 자살했을 때 담을 무너뜨려 시체를 덮은 것에 나타나 있고, 그의 용맹은 밤부터 새벽녘까지 계속 싸운 것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피곤에 지쳐 있으면서도 적에게서 보검을 빼앗고,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도 말을 달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장수들 베고 창을 배앗으며 단신으로 조조 진영의 명장 50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사실은 조운이 유선을 안고 감부인을 보호하며 재빨리 물러난 곳은 관산이었다. 이런 상황에 적군 속에서 종횡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조운이 장판에서 적과 육탄전을 벌여, 목숨을 걸고 유선을 구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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