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관심사/꼬양이 이야기

가장 이상적이고 공정한 관계, 고양이

와이즈캣 2007. 1. 8. 02:08


출처 : 신개념 여행미디어 그룹, 노매드 : [모던타임즈 연재] 죽기 전에 놓치지 말아야 할 서른 가지 -11- 고양이


필자의 발 밑에는 지금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자고 있다. 이곳 영국에서 생후 두 달 된 새끼를 데려와서 어느새 세 살 반이 되었다. 이름은 오이. 지난 15년간 내가 키우게 된 네 번째 고양이다.

개는 표현이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단순하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한다. 하지만 고양이에 대해서는, 이제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오해와 편견이 참으로 많은 것 같다. 필자 역시 그런 무지로 인해 첫 고양이에게는 제대로 주인 역할, 가족 역할을 해 주지 못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아직도 생각나면 그저 창피하고 미안할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가지는 편견의 주된 내용들, 고양이는 길이 들지 않는 야생 동물이라는 것에서부터 귀기 서린 요물이라는 미신적인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 대부분은 전혀 근거가 없거나 크게 과장된 것이다. 사실 그렇기는커녕,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 고양이만큼 순하고 귀엽고 애교와 정이 많은 동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살거나 식구가 적거나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 고양이만큼 좋은 생활의 반려자도 없다(그렇다고 개가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개에게는 개만의 결정적인 매력들이 있고 필자는 그런 면들 또한 사랑한다).

그래서 오늘은 착각과 오해 속에서 때로 천시받는, 하지만 분명 죽기 전에 놓치기 아까운 매력적인 존재인 고양이 이야기를 좀 할까 싶다. 


오이. 후래쉬 빛 때문에 좀 못돼 보이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훨씬 예쁨...


...고양이는 참 특이하고도 신비한 동물이다.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고양이과 동물들은 거대한 사자나 호랑이에서부터 집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다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걷는 폼도 비슷하고 몸매도 비슷하고 발도 비슷하며, 다만 다른 것은 색깔과 크기, 귀의 모양새 정도다(호랑이나 사자의 귀는 동그랗고 고양이 귀는 뾰족한 등). 성격도 사납고 아니고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동소이한 편이다.

자연계의 어떤 포유류도 한가지 종이 사실상 같은 모양을 유치한 채 이렇게 다양한 크기로 분화한 경우는 없다(파충류 이하에는 꽤 있다. 뱀, 도마뱀, 개구리, 가재, 게, 새우, 거미 등등). 물론 종류와 크기, 색깔로 따지자면 개가 더 다양하겠지만 이는 대부분 비교적 근래에 행해진 인위적인 품종 개량의 결과다. 그러나 고양이과 동물의 경우, 애완용 집 고양이를 제외하면 모두 자연적인 것이다.

약간 과장해서 고양이를 그 비율 그대로 좀 크게 하면 살쾡이가 되고(이 살쾡이가 길들여져 집 고양이가 된 것), 그 살쾡이를 그대로 크게 하면 퓨마나 표범이 되며, 이것을 또 크게 하면 사자나 호랑이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동물 다큐멘터리 등에서 호랑이나 사자가 뒹굴고 놀거나 널브러져 자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우리 집 고양이 오이와 똑같은 모습에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이런 점은, 동물학자들이 고양이과가 포유류 중 가장 균형 있고도 완벽하게 진화한 종이라는 점에 대체적으로 의견을 같이하는 근거 중 하나다. 물론 가장 많이 진화한 것이 인간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인간의 진화는 두뇌와 손, 발성 기관 등에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는 데에 반해 고양이는 높은 지능과 - 고양이의 지능은 개와 비슷하다 - 점프력, 순발력, 유연성, 균형감각, 속도, 효과적인 앞발의 사용과 강하고 날카로운 발톱/이빨 등 다른 동물에서 찾기 힘든 놀라운 신체적인 능력을 골고루 갖춤으로써 전방위적 진화의 가장 성공적인 예라는 말이다. 고양이과 동물들이 크기를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서로 비슷한 외형과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진화의 결과로서 그런 그들의 현재 모습이 그만큼 이상적이기 때문이라는 반증인 셈이다.

...암튼간에, 이런 고양이를 인간이 키우기 시작한 것은 대략 5천 년에서 만년 정도 전인 것으로 추정된다. 개의 경우 5만년 이상 되었다고 이야기되는 만큼 고양이가 인간과 같이 산 것은 분명 개보다는 한참 늦은 셈이다.

처음에 키우게 된 계기도 분명히 달랐을 것이다. 개의 조상벌인 늑대 류는 무리 지어 사는 경향이 있고 합동으로 사냥을 하는 등 지능도 뛰어나거니와 그룹 활동에 대단히 재능이 있다. 이런 늑대의 특성은, 일단 길이 들고 인간과 의사소통만 된다면 - 의사소통은 말과 글로만 하는 것이 아닌 만큼 - 농장이나 목장 등에서 침입자를 경계하고 야생 동물을 쫓고 가축을 통솔하는 등의 일에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렇게 일을 시키는 대신 인간은 먹이와 안정된 주거 공간, 그리고 전반적인 보살핌을 제공하는 것이고 그 결과 야생에서의 생활보다 건강 상태나 생존율이 훨씬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양이과는, 사방으로 트인 초원에 사는 사자 등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독립적이고 혼자 생활하는 동물로 이런 식으로 일을 시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인간과 고양이의 만남은 아마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사는 곳에는 음식이 저장되며 또한 쓰레기가 생기고, 그런 곳에는 쥐가 출현하기 마련이다. 처음에 살쾡이들은 순전히 주된 먹이인 쥐가 많다는 이유로 인간이 사는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골치거리인 쥐를 잡아먹어 주니 결국 인간에게 도움이 되었고, 따라서 인간들 역시 살쾡이의 출현을 묵인, 방조했으며 개중 순한 녀석들에게는 가끔씩 먹이를 주거나 가까이 오게 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인간의 주거지 주변에서 태어나고 새끼를 낳고 평생 사는 살쾡이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대대로 이어지면서 점점 더 순해지고 또 인간과 가까워진 것이다.

요컨대, 개는 오래 전부터 인간에게 '사육'된 동물이지만 고양이는 그보다 훨씬 늦게 인간의 주변에 살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환경을 이용해 스스로 사냥해 먹고 산 동물이라는 차이가 있다. 현재는 물론 대부분의 집 고양이들이 사냥을 거의 하지 않고 개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마련해 준 먹이를 먹으며 생활하지만, 불과 백여 년 전까지도 애완동물이라기보다는 쥐를 없애주는 역할을 하며 인간과 공생하는 형태의 관계가 주였고, 흔히 도둑고양이라고 하는 길고양이들은 지금도 수천 년 전 과거와 유사한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순해 보인다 한들 내면 깊숙한 곳의 야성은 분명 고양이가 개보다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인 셈이다. 




오이는 필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드물다. 책상 옆 프린터 위에 자리잡은 오이.


그러나 그렇다고 고양이가 길이 들지 않는 '야생동물'인 것은 절대 아니다. 또 오래된 편견으로서 고양이는 살고 있는 집에 정을 들일 뿐 인간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다는 말 - 이 주장은 흔히 상당히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 도 있는데, 오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키워본 경험에 따르면 그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양이의 야성은 개보다는 강하지만 내면 깊이 잠재되어 있을 뿐, 야생동물의 그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대부분 고양이의 성격은 태어난 후 몇 달 간 어디서 어떻게 자랐느냐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이런 점이 천성적으로 야성이 많이 사라져 고양이에 비해 자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개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고, 또 사람들이 갖는 편견의 원인이기도 하다.

새끼 때부터 정상적인 가정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고 인간과 친숙해진 고양이는 평생 결코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을 믿고 따르며 가족으로 여기고 웬만해서는 야성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는 말이다. 또 중성화 수술 - 일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중성화 수술은 고양이의 건강 상태와 수명을 연장해 줄 뿐더러 개에 비해 번식력이 훨씬 높은 고양이가 수시로 새끼를 낳음으로써 주인이 책임질 수 없게 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다. 특히 아파트나 실내에서만 키우는 고양이의 경우 수술하지 않으면 발정기에 고통스러워 하므로 필수적이다 - 을 하고 집 안에서만 자란 고양이는 굳이 밖으로 나가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바깥을 싫어하고 실내에서만도 행복하게 잘 산다.

그러나 어려서 사람이 수시로 때리거나 안정된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경우는 거칠고 불안정해지는 경우가 많고, 길에서 태어나 어느 정도 자란 경우는 설사 집으로 데려 온다 한들 집고양이는 되기 힘들다. 어려서 보고 배운 대로 사는 습성이 유달리 강하기 때문에 주인이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이 말은, 고양이를 '야생동물'이나 '요물'이라고 여기고 그렇게 대하는 사람 주변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는 결국 주인에 의해 그런 모습에 가깝게 만들어져 버린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 있거나 자기 성격이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사람에게 고양이는 적합한 애완동물이 아니다. 옛날 피비 케이츠가 주연했던 그렘린이라는 영화를 보면 귀여운 신비의 동물 모과이가 그를 키울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지 않은 젊은 주인의 여러 실수로 인해 무서운 괴물로 변하게 되는데, 물론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지만 이와 비슷한 식의 기준이 고양이 키우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고양이는 자존심이 세고 또 예민해서 상처를 잘 받기 때문에 거칠게 키우는 경우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단 어려서부터 애완동물로 사랑을 많이 주고 차분하게 큰 고양이는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하는 수많은 장점을 갖게 된다.

일단 고양이는 얌전하다. 종류에 따라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흔히 하루 종일 주인 근처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고, 웬만해서는 귀찮게 구는 법이 없다. 또 고양이는 대소변을 가리는 일에 철저해서 고양이용 모래만 준비해 놓으면 개처럼 훈련을 시킬 필요도 없고, 실수를 하는 법도 없으며 용변 후 깨끗이 덮어놓기 때문에 냄새도 거의 나지 않는다. 그리고 고양이는 식탐이 없어서 일단 사람 먹는 음식을 먹지 않게 버릇만 들여놓으면 사료만 줘도 평생 행복하게 먹으며 생선이나 고기가 식탁에 있어도 훔쳐 먹는 일은 극히 드물다(단 마요네즈나 우유의 유혹에는 약한 편).  

그리고 고양이는 조용하다. 가끔 '애기 우는 소리' 같은 섬칫한 고양이 우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대부분 발정기 때 짝을 찾지 못해서 내는 소리다. 중성화시킨 고양이나 바깥 출입이 자유로운 고양이들은 이런 소리로 울지 않고, 대부분 기분이 좋을 때나 밥을 줄 때 아주 작은 소리로 귀엽게 울 뿐이다. 참고로 고양이 우는 소리는 대부분 '야옹'보다는 '냥~'에 가까워서 요즘은 고양이를 냥이라고도 잘 부른다.

또 고양이는 애교가 많은데, 개의 적극적인 형태와는 달리 고양이의 애교는 아주 은근하고 섬세해서 다른 맛이 있다. 고양이에 대한 편견을 가졌거나 사람을 보면 숨곤 하는 길고양이만 본 사람들은 이것을 경험할 기회가 없는데 일단 겪어 보면 애교 많은 여자를 고양이에 비교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일례로 바로 오늘 아침만 해도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다가 - 런던 한인타운 - 혼자 산책하고 있는 집 고양이를 봤다. 처음 보는 고양이인데도 부르니까 다가와서 가르릉 거리며 다리에 머리와 몸을 비빈다. 이곳 영국에서는 길에서 고양이를 만났을 때 이렇게 부르면 대부분 다가와서 애교를 부린다고 보면 된다. 자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답례인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 사람들이 고양이나 기타 동물들에게 괜한 해꼬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산책 나온 고양이가 낯선 사람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보기는 힘들다. 결국 고양이라는 동물은 단지 개인이나 가정 뿐 아니라 사회의 동물에 대한 관용과 이해도까지 반영하는 지표인 셈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애완동물에 대한 영국과 우리나라의 수준 차이다.

또 고양이는 섬세하다. 잘못 키우면 이 섬세함이 지나친 예민함과 공격성이 될 수도 있지만, 잘 키우면 참으로 사랑스러운 형태로 발전해 나간다. 예를 들어 필자가 키우는 오이의 경우, 원래 타고난 좀 성격이 천방지축인 편이라 어려서는 힘도 들었지만 이제는 어른스러워져서 필자가 장난 삼아 거실 바닥에 쓰러져 죽은 척 하고 있으면 꼭 다가와서 괜찮은지 살피는 사려 깊은 면도 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금방 눈치채는 것이다.

또 아침에 사료가 그릇에 남아 있어도 한번 와서 애교를 부리고 새로 밥을 달라고 한다. 그때 한 두세 알 주는 척 해도 그 성의를 고맙게 여기며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내가 침대에 누워 있을 때는 밥 먹기 전에 배 위에 올라와서 가르릉 거리며 애교를 떨고 나서야 내려가서 먹는다. 이렇게 고양이는 각자 나름대로의 생활의 기준이 있고, 사람에게 애정 표현과 감사의 인사를 하는 패턴이 있는 것이다. 일단 이 패턴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행동들의 의미가 느껴지고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생후 3~4개월 경 오이 모습. 한시도 가만히 잊지 못해서 사진 찍기도 힘들었다. 눈 색깔이 지금과 다른 보라색.


그리고 고양이는 아주 깨끗하다. 고양이의 깨끗함은 사실 여성스러운 청결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육식 동물의 사냥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냥감에 들키지 않고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몸을 닦고 냄새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성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애완동물로서는 더 없는 장점이 된다. 오이의 경우 지난 3년 반 동안 한번도 목욕을 한 적이 없지만 - 우리나라에서는 습기와 폭염 등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가끔은 해야 한다 - 털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동물 냄새 대신 마치 곰 인형 같은 냄새가 난다. 이러니 혼자 사는 사람이나 노약자들이 키우기에도 아무런 부담이 없을 수 밖에 없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활동적이고 움직이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개가, 조용하게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은 사람에게는 고양이가 이상적인 반려 동물이 되는 것이다. 낮 시간에 집을 많이 비우는 경우도 개는 무척 외로워하지만 고양이는 혼자도 잘 있고 대개 잠으로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물론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활동적이고 가족이 많은 집에 사는 고양이는 또 다소 그런 성격이 되기도 하고, 혼자 있어도 의젓하게 주인을 기다리는 개도 많다. 여하튼 고양이는 나름의 특성만 이해하면 개보다 전혀 못하지 않은 사랑스럽고도 아름다운 애완동물이라는 말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고양이 문화가 일천한 관계로 고양이의 습성과 심리, 행동 패턴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고 그로 인해 편견과 착각이 만연해 있는데, 이는 고양이나 사람 양쪽에 모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 고양이의 행동과 생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떤 오해와 편견들이 있을까.




먼저 앞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고양이는 집에만 정을 들인다' 는 말이 있다. 더 나아가 이사를 갔더니 고양이는 안 따라오고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더라는 경험담도 간혹 들린다. 고양이가 개에 비해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 집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집에 정을 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겁이 많아서다. 자기가 익숙하지 않은 장소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를 데리고 이사를 다니면 처음 간 집에 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반나절이나 한나절 정도는 어딘가 후미진 구석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천하의 왈가닥이었던 오이마저도 옷장 뒤의 좁디 좁은 틈새에 몇 시간이나 쑤셔 박혀 있었다.

따라서 주인이 번잡한 이사의 과정에서 고양이의 이런 두려움을 충분히 고려해서 챙겨주지 못한다면, 예컨대 이사가 진행되는 중이나 직후, 문이나 창문이 열려 있고 많은 낯선 사람들이 들락날락 할 때 고양이를 대충 풀어 놓는다면 고양이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 밖으로 도망가 버릴 수도 있는 거다. 또 새로 이사온 집이니 일단 나가면 찾아 오지도 못한다(고양이의 후각은 개보다 훨씬 못하다). 이런 상황을 두고 '사람보다 집에 정을 들여 이사하니 도망갔다' 고 매정하게 생각한다면 고양이 입장에서는 갑갑할 뿐이다.

또 고양이는 주인이 불러도 금방 오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은근함과 섬세함, 자존심 때문에 즉각 달려오지는 않지만 주인의 목소리 눈빛 하나하나를 다 의식하고 있다. 오이의 경우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어도 이름을 부르면 꼭 꼬리를 살짝살짝 흔드는데 결코 예외가 없다. 항상 주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기고 관심을 갖고 있는 증거다. 아닌 척 하면서 그러고 있는 이런 내숭도 일단 이해하고 나면 또 고양이만의 매력이다. 그럴 때 혹시라도 사람을 무시한다고 욕을 하거나 때리기라도 하면 고양이는 크게 당황하고 상처받는다.

고양이가 얼마나 사람을 좋아하는지는 러시아의 고양이 서커스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세계 곳곳에서 공연을 벌이고 있는 이 서커스단은 특성상 수십 마리의 고양이가 사람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따르도록 훈련시켜야 하는데, 개나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고양이는 식탐이 적기 때문에 먹이를 주는 것으로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 단장에 따르면 고양이가 서커스를 하게끔 만드는 방법은 지속적인 칭찬과 애정을 주는 것 뿐이라고 한다. 주어진 일을 잘 하는 고양이를 예뻐하고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 다른 고양이들이 샘을 내면서 서로 잘 하려고 하고, 그렇게 해서 훈련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예는 인간에게 무심할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과는 전혀 상반된 것으로 사람들이 고양이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고양이는 한을 품고 복수한다는 말도 마치 진실인 양 굳어져 있고, 이런 식의 이미지는 에드가 알란 포의 '검은 고양이'같은 문학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만큼 말도 안 되는 편견도 없다. 필자가 예전에 본 글 중에서 '도둑 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매일 같이 뒤져 방망이로 내 쫓았더니 다음날부터 매일같이 썩은 생선이나 죽은 쥐를 대문 앞에 물어다 놓으며 복수하더라' 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런 류의 스토리는 아마 독자 여러분들도 대부분 익숙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양이라는 존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완전한 오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비록 인간의 입장에서는 더럽고 냄새 나는 생선 쪼가리나 썩어가는 쥐 시체일 뿐이지만 항상 배가 고픈 길고양이에게는 둘 다 소중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매일 같이 집 앞에 갖다 놓는 것은 복수는 고사하고 고양이 쪽에서 먼저 화해를 청하는 행동이다. 예컨대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너한테 주니까 나도 너희 쓰레기통에서 다른 음식 좀 가져가자... 화 내지 마라' 는 제스처인 것이다.

비슷한 예로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나가서 새나 쥐를 잡아 - 때로 약간 먹은 후에 - 집에 물고 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가져온 것은 대부분 더 먹지 않는다. 이럴 때 고양이의 심리 속에는 '내가 이런 것을 잡았으니 칭찬해 줘' 라는 것 하나와, '나는 밖에서 이만큼 먹었으니까 너도 남은 거 먹어' 라며 나름대로 주인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들어 있다. 이럴 때 더러운 것을 물고 온다고 때리거나 저주한다고 생각해서는 기껏 마음 쓴 고양이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고양이의 이런 심리는 이미 오래 전에 입증된 것이며 필자가 만든 이론이 아님).

그 밖에도 고양이는 화가 나면 눈에 불을 켠다거나 (밤에 잘 볼 수 있도록 눈에 빛에 반응하는 물질이 들어있기 때문일 뿐), 털을 거꾸로 쓰다듬으면 할퀸다거나 (절대 그런 일 없음) 하는 등의 이상한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굳어져 있는데 그 대부분은 그저 오랜 편견이 낳은 오해일 뿐이다.


오이 전에 키우던 가지. 영국에 온지 사흘 만에 셋집 앞길에서 발견했다. 행동 패턴으로 보아 분명 길고양이가 아님에도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이 불쌍해 먹이를 주자 집까지 따라와서 결국 키우게 되었다.

이미 늙고 병이 깊어 결국 8개월 밖에 더 살지 못했지만 순한 성격과 깊은 정을 가진 고양이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 주었다. 버림받은 상태로 길에서 비참하게 죽지 않고 내 품에서 평화롭게 간 것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가 직접 뒤뜰에 묻었다.


...예전에 고양이를 잃은 젊은 주인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주 집 근처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어느 날 돌아오지 않아서 며칠을 찾아 다니다가, 결국은 근처의 어느 집 빨래 줄에 죽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그 집에 들어가 따졌더니, 70대 할머니가 나오면서 '요사스러운 것이 우리 집에 들어오길래 때려 죽였다' 는 거다. 주인이 있는 고양이라는 생각은 안 했냐고 하니 '고양이가 무슨 주인이 있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소리를 듣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온 몸에 피멍이 든 채 죽은 고양이 시신을 수습해 갔다는 그 주인 만큼이나, 필자 또한 오래 전부터 그런 미신과 편견에 익숙한 상태로 평생을 산 노인 분을 마냥 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모습은 인간이, 또 우리나라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무지와 편견을 상징하는 극단적인 예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약한 동물이라고 우리 맘대로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그 운명을 아무렇게나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오만하고도 또 야만적인 행위다. 말을 못할 뿐 동물들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 애완동물 문화가 정점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들려오는 이야기는 주로 미용이나 순종 거래 등등 주로 화려하고 외형적인 것들이고 진짜 동물을 위하고 아끼며 책임지는 마음을 키워 나가는 부분에 대한 고민은, 물론 예전보다는 낫겠지만 상대적으로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고양이는 처음에 이해하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동물이다. 외국 언론에 보면 혼자 살던 노인이 전 재산을 고양이에게 물려줬다는 식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 행동 자체의 가치 판단은 별개의 문제지만, 여하튼 그 고양이가 노인이 가장 외롭고 힘들 때 그 옆에서 차분하게 노년을 지켜봐 준 것만은 분명하다. 야생동물이나 요물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고양이는 우리가 살아 생전에 한번은 키워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동물이다. 우울하고 외로울 때 어느 틈에 내 무릎 위에 올라와 가르릉 거리고 있는 고양이만큼 위안이 되는 동물도 흔하지 않다. 기본적인 지식과 습성에 대한 이해와 아주 약간의 참을성만 있다면 고양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 준다.

그러니 혹시 애완동물을 키우려 계획하시는 분들, 고양이에 한번 도전해 보시라. 그리고 괜히 비싼 순종 고양이 사지 마시고 보호소에 맡겨진 고양이를 한번 데려와 보시는 것을 권한다. 길고양이 출신이라면 모르지만 집에서 살다가 버려진 고양이는 대부분 순하고, 다시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매일같이 꿈꾸고 있다. 그리고 버려진 자기를 그렇게 데려가 주면 그 상황을 이해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는 착하고 똑똑한 동물이다. 

돈을 주고 사는 것보다 그렇게, 놔두면 결국 안락사 될 수 밖에 없는 불쌍한 버려진 동물을 구해 주는 것은 참으로 값진 일일 것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런 행위 자체도 '죽기 전에 놓치지 말아야 할 일' 중 하나에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다음 시간에.